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로사와 아키라 (문단 편집) == 여담 == * 참고로 이름의 청탁음을 확실히 구분한 표기는 '''쿠로사와''' 아키라지만 [[외래어 표기법/일본어|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에 따라 '''구로사와'''로 표기하며 이는 당 문서에서 언급되는 그의 모든 작품에도 공통된다.[* 간혹 '''구로자와'''라고 표기하는 매체가 있지만, '''구로사와'''가 맞다. 여담으로 같은 성을 쓰고 있는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남이다.] * 1952년 [[라쇼몽]][* 1952년은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분야가 신설된 1957년 보다 한참 전이라 당시 상 이름은 Honorary Foreign Language Film이다.]으로[[https://www.youtube.com/watch?v=e26B1gnoSk4&t=0s|#]], 1976년 데르수 우잘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는데[[https://www.youtube.com/watch?v=2niE0pk7d0w&t=0s|#]], 2번 다 불참했다. 대신 수상소감문을 다른 사람이 낭독했다. 2번 다 구로사와는 차기작 준비로 바빴다 한다. * [[고기]]를 무척 많이 먹는 식습관이 있었고 그 [[육식]] 체질에 [[기타노 다케시]]도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구로사와는 기타노에게 "식사는 밸런스가 중요해."라고 말했는데 이는 [[야채]]나 [[과일]]도 먹어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돼지고기]], [[닭고기]] 등의 다양한 고기를 먹어야 된다는 의미였다고.(…) 고기를 자주 먹는 서양의 식사와는 달리 고기를 적게 먹는 일본의 식사 문화의 입장에서는 진보적인 발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성 때문인지 1910년대 출생 일본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182cm[[https://www.celebheights.com/s/Akira-Kurosawa-48465.html|#]]의 엄청난 [[거구]]였다.[* 1910년대생 일본 남성 평균 키는 162cm 정도였고, 2022년 1월 기준 일본 남성 평균 키는 170cm이다.] 본 문서에도 실린 아카데미 영화제 공로상 시상식에서 루카스, 스필버그와 나란히 서있는 사진을 보자면 그 덩치에 깜짝 놀라는 사람이 다수. 183cm인 존 포드 옆에서도 꿀리지 않는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Kurosawa and John Ford.jpg|width=100%]]}}} || || [[존 포드]] 감독의 1958년작 Gideon of Scotland Yard 촬영장에서의 [[구로사와 아키라]] 아내 야구치 요코와 함께. || * [[술]]도 엄청나게 마신 애주가였다. 이에 관련된 일화로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일본에 방문해서 구로사와를 만났을 때 그가 웬일로 술을 안 마셔서 그 이유를 묻자 "더 마시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더 이상은 안 돼요!' 라고 신호를 보낸 탓에 어쩔 수 없이 끊어야 했다."라고 말했다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회고도 있다. 젊었던 시절에는 워낙 말술을 마시는 탓에 [[미후네 토시로]]는 구로사와가 취한 듯 보이면 도망쳐 버리고 대신 다른 배우가 구로사와에게 붙들려 고생 좀 해야 했다는 이야기도 회자된다.(…) * 나이 들어서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는데, 이는 [[존 포드]]를 향한 존경의 표시라고 밝혔다. * [[미야자키 하야오]]를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통해 알고서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한다. 장녀 구로사와 가즈코의 말에 의하면 《[[마녀 배달부 키키]]》를 보고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감동했다고 하며, 미야자키의 작품들 중에서는《[[이웃집 토토로]]》를 제일 좋아했다고.[* [[이웃집 토토로]]는 [[https://www.google.com/amp/s/faroutmagazine.co.uk/akira-kurosawa-100-favourite-films-list-kubrick-scorsese/amp/|구로사와 아키라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100선]]에도 포함되었다. [[애니메이션 영화]]로서는 유일하다.] 다만 《[[반딧불이의 묘]]》를 미야자키의 작품으로 착각해 찬사가 담긴 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미야자키가 일순 굳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참고로 이 작품은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이었다. 물론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이긴 하다.] 한편, 일설에 의하면 '미야자키가 실사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그가 없는 자리에서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에 대해 구로사와의 발언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가 실사 영화와 비교해서 [[애니메이션]]을 낮잡아 보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자신은 구로사와의 말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https://www.google.com/amp/s/soranews24.com/2019/04/13/hayao-miyazaki-was-offended-by-the-idea-that-he-should-work-in-live-action-interview-shows/amp/|#]]] * [[대한민국]]의 거장 [[임권택]] 감독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영화를 재밌다면서 즐겨 보곤 했다고 한다. 각기 한일 양국 영화계에서 거장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이다. 1990년 월간 로드쇼에서 인터뷰를 했을 때에도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임권택]] 3대 걸작'을 뽑을 정도였다고 한다. [[만다라(영화)|만다라]]와 [[씨받이(영화)|씨받이]], [[아벤고 공수군단]]이 바로 그것이다. * [[소련]]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랑도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둘이 술을 마시면서 [[7인의 사무라이]] 주제가를 합창할 정도였다고. * 서양권으로부터 인정받은 최초의 아시아인 영화감독답게 [[타임지]] 아시아판이 2006년에 창립 60주년 기념으로 선정한 [[https://web.archive.org/web/20110411004931/http://www.time.com/time/asia/2006/heroes/at_kurosawa.html|60년간 아시아의 영웅 65명]]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7인의 사무라이나 라쇼몽, 거미집의 성 등을 본다면 자막판을 추천한다. 일본인들도 제대로 대사를 알아듣기 힘들다는 평이 많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필름이 오랜 기간 열화되어 그렇다거나, 대사에 집중하도록 하는 의도적인 장치라는 설도 있지만 영화 개봉 당시에도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한다. 깨끗하게 소리를 입힐 수 있는 후시 녹음을 택하지 않고, 일부러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동시 녹음을 고집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는데, 감독의 성격을 보았을 때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 일본 영화 최초로 극 중에 [[재즈]]를 삽입한 감독이다. 해당 장면은 1948년작 '주정뱅이 천사'에 나온다. * 구로사와 아키라가 유년기 감상한 영화들[[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nouvellevague&no=801894&_rk=96k&exception_mode=recommend&page=1| #]] * 구로사와는 젊은 감독들에게 "고통스러워도 각본을 직접 써보라"란 말을 남겼다.[[https://youtu.be/CbRi64ITvFw|#]] * 2020년 [[PlayStation 4|PS4]]로 출시되는 [[오픈 월드]] [[액션 어드벤처 게임]]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흑백 모드 플레이는 '구로사와 모드'란 이름이 붙여졌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구로사와 프로덕션의 공식 허가를 받고 이 명칭을 사용했다고 한다.[[https://bbs.ruliweb.com/ps/board/300001/read/2218411|#]] * [[세가타 산시로]]라는 캐릭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데뷔작인 <스가타 산시로>를 패러디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